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미국 흑인 (문단 편집) ==== 1970년대 이전 ==== [[출구조사]]란 개념이 1967년에 등장한 만큼, 그 이전의 인종별 투표 비중을 정확히 추론하기는 어렵다. 일부 연구 사례를 참고하는 정도가 고작이나 이를 첨부한다. [[https://digitalcommons.salve.edu/cgi/viewcontent.cgi?article=1077&context=pell_theses|이 자료]]에 따르면 1932년 미국 대선 당시 미국 흑인 커뮤니티는 [[프랭클린 루즈벨트]]의 뉴욕 주지사 시절을 문제 삼아 그에게 거의 기대하지 않았다. 여러 흑인 지도자들이 FDR과 민주당 지지를 호소하였으나, 시카고에서 민주당이 지역의 흑인들에게 얻은 표는 21%에 그쳤다. 민주당이 점차 진보적으로 이동해오고 있었지만, 미국 백인 서민들을 위한 진보란 인식이 여전히 강할 때였다.[* 트러스트를 해체하던 공화당은 20세기 초반을 거쳐 점차 경제적 자유주의 성향을 굳혀 오고 있었고 그로 인해 부자와 엘리트 정당이란 이미지가 강했다. 반면에 민주당은 농민과 노동자 등 서민을 위한 정당이란 이미지를 갖고 있었는데, 여기서 서민은 아직 백인을 중심으로 했다.] 사실 흑인들이 참정권을 처음 가졌을 때부터 [[1920년대]]까지는 [[공화당(미국)|공화당]] 지지성향이 강했다. 애초에 공화당 자체가 휘그당이 노예제 폐지에 미온적이라고 반발한 당원들이 탈당해서 만들어진 정당이라 노예제 폐지를 적극적으로 주장하던 정당이었고 노예해방선언을 한 링컨 대통령도 공화당 소속이었기에 흑인들도 자연히 공화당을 적극적으로 지지했다. 더군다나 이때는 미국 남부에서 민주당의 지지가 강했는데 미국 남부지역의 인종차별주의자들도 상당수가 민주당 소속으로 정치활동을 하고, 이들이 미국 남부에서 흑인들의 참정권을 실질적으로 박탈하는 데 큰 영향을 끼쳤기 때문에[* 물론 [[1890년대]] 이후로 민주당이 [[인민당]]의 노선을 일정부분 받아들이면서 나름대로 진보적인 색채를 받아들이게 되었고, [[윌리엄 J. 브라이언]]이나 [[우드로 윌슨]] 등 당대에 나름대로 진보적인 스탠스였던 정치인들이 민주당 소속으로 활동하고 있었기는 했지만 동시에 상당수 인종차별주의적인 보수주의자들이 민주당에서 활동하고 있었다. 이들은 진보적인 대통령의 대명사로 손꼽히는 [[프랭클린 D. 루스벨트|프랭클린 루스벨트]]와 [[존 F. 케네디]]때까지도 민주당에 잔류해있다가 [[1960년대]] 중반 이후로 민주당이 진보적인 색패를 확 띄게 되면서 공화당으로 빠져나오게 된다.] 민주당에 대한 반감이 거세질 수밖에 없기도 했다. ([[딕시크랫]]이라고 부른다.) 1924년까지 민주당 전당대회엔 흑인이 입후보가 허용되지 않았다. 그러나 1929년 [[대공황]] 이후 경제난으로 대다수의 흑인들이 피해를 봤고 이후 [[프랭클린 D. 루스벨트|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이 [[뉴딜 정책]]을 펼치자 대다수의 흑인들이 민주당을 지지하면서 [[공화당(미국)|공화당]] 지지성향이 약해지고 [[민주당(미국)|민주당]]이 우세해졌다. 다만 그래도 이때까지는 상당수 인종차별주의자들이 미국 민주당에 남아있었을때라서 아직 공화당을 지지하는 성향의 흑인들도 적지 않게 남아있었고, [[마틴 루터 킹]] 목사도 공화당 당원이었지만, [[1960년대]] 민권운동 시기 공화당에서 민권운동에 미온적인 태도를 보이고 민주당에서 [[존 F 케네디]] 대통령과 [[린든 B. 존슨]] 대통령대 들어서 흑인들의 권리향상을 약속하자 공화당 지지성향의 흑인들 대다수도 민주당 지지로 돌아서며 민주당 지지가 절대적인 수준에 이르게 된 것이다. [[1970년대]] 이후로는 절대 다수의 흑인들은 민주당을 지지하며 진보적 성향을 갖고있다. 더군다나 로널드 레이건 정부 이후로 공화당이 복지정책 축소를 지지하는만큼 공화당 정부가 들어서면 흑인들에 대한 복지예산을 깍아내는 경향이 있는데다가 인종차별주의자적인 당원들도 상당수있고 심지어 공화당 우세지역에서 [[투표 억압|흑인들의 참정행위를 방해하니]][* 물론 1960년대 이전 남부처럼 대놓고는 아니고 주의회 차원에서 은근슬쩍 투표시간을 단축한다거나 투표소를 흑인 밀집지역에서 멀리 떨어트린다거나 하는 식이다.] 흑인들 입장에서 공화당에 대한 반감이 강한 것은 당연하다. [[https://www.factcheck.org/2008/04/blacks-and-the-democratic-party/|자료1]], [[https://www.nytimes.com/1996/09/19/us/gop-tries-hard-to-win-black-votes-but-recent-history-works-against-it.html|자료2]]에 따르면 뉴딜 정책 이후 흑인들은 대거 민주당 지지 성향으로 선회하였다고 한다. 1936년 대선에서 루즈벨트는 흑인 표의 71%를 얻었고, 공화당은 28%를 얻었다. 1936년 루즈벨트는 남부에서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필라델피아의 민주당 전당대회에 흑인들을 선거인단으로 입후보시켰고, 이로 인해 흑인 사회에게 높은 지지를 받았다. 루즈벨트의 3선과 4선으로 인해, 흑인들의 민주당 지지는 줄어들고 공화당 지지가 늘어났으나 여전히 더블 스코어 수준이었다. 이후 1948년 대선에서 [[해리 트루먼]]은 미군 내 인종 통합 정책 등을 바탕으로 더 높은 흑인 지지를 얻었다. 그가 얻은 흑인 표는 약 77% 수준으로, 1936년 FDR의 지지 71%를 뛰어넘었다. 1952년 대선에선 아이젠하워가 공화당에서 나왔으나 흑인 득표율은 약간 늘어나는 데 그쳤다. 1956년 대선에서 아이젠하워는 FDR이 가져간 흑인 표를 가장 많이 회복했다. 아이젠하워는 흑인 표를 39%를 얻었고, 그를 이은 닉슨도 1960년 대선에서 32%의 흑인 표를 얻었다. 그러던 것이 [[민권 운동]]을 거치며 공화당이 이에 미온적으로 대응하자 1964년 대선에서 흑인들은 [[린든 존슨]]에게 압도적인 지지를 보냈다. 존슨은 흑인 표의 94%를 얻은 것으로 추정되며, 이는 흑인이었던 [[버락 오바마]]가 얻은 득표율과 비슷하다. [[배리 골드워터]]가 개인적으로 인종차별에 반대한 것과 달리, 민권 문제에서 각 주의 소관[* 미국에서 민권 문제가 각 주의 소관이라는 태도는, 곧 남부 각 주가 시행했던 흑인 억압 조치들을 인정하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이라는 태도를 보인 데 흑인 공화당원들이 많이 실망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1968년 대선에서 닉슨은 1964년에 골드워터가 흑인들에게 얻었던 득표율보다 더 많은 표[* 약 2-2.5배로 추정된다.]를 얻었다. 약 15% 내외였다. 닉슨이 1960년 대선에선 32%의 흑인 표를 얻은 걸 감안하면, 오늘날 미국의 흑인의 투표 성향은 1960년대에 그 구조가 고착화되었다고 할 수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